[기고] 결정적 증거가 법정에서 사라지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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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6-06-16본문
검찰 증거기록을 넘기다 보면 ‘이 한 장이면 끝나겠다’ 싶은 증거를 만날 때가 있다. 범행이 그대로 담긴 휴대전화 메시지, 범인의 동선을 또렷이 비춘 CCTV, 자백이 적힌 메모. 그러나 형사사건을 오래 다뤄 본 변호사라면, 그 ‘결정적 증거’가 정작 법정에서는 단 한 글자도 유죄의 근거가 되지 못한 채 사라지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았을 것이다. 형사사건의 승패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증거능력 있는 증거로 증명할 수 있는가’에서 갈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법정 밖의 진실이 아무리 명백해 보여도, 법정 안에서는 적법하게 수집되고 신빙성이 담보된 증거로 ‘합리적 의심을 넘어’ 증명된 사실만이 유죄의 토대가 된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재판의 오래된 원칙이 여기서 나온다.
그래서 증거는 ‘있다’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증거가 ‘어떻게 얻어졌는가’가 먼저 다뤄진다. 대법원은 이미 근 20년 전인 2007년 전원합의체 판결(2007도3061)을 통해,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정한 절차를 위반하여 수집한 증거는 원칙적으로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없고, 그것을 기초로 다시 얻은 2차적 증거도 마찬가지라고 선언했다. 압수물처럼 형상이 변하지 않는 물적 증거라도 영장주의의 정신을 몰각할 만큼 절차 위반이 중대하면 증거능력이 부정된다. 형사소송법 제308조의2가 “적법한 절차에 따르지 아니하고 수집한 증거는 증거로 할 수 없다”고 못 박은 이유다.
디지털 증거의 시대가 되면서 또 하나의 장면이 더해졌다. 휴대전화 포렌식, 메신저 대화, 컴퓨터에서 출력한 문건은 가장 강력한 증거이면서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증거다. 한 글자만 바뀌어도 의미가 달라지고, 복제·변환 과정에서 원본과 어긋날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2013. 7. 26. 선고 2013도2511 판결(이른바 왕재산 사건)에서, 정보저장매체에서 출력한 문건을 증거로 쓰려면 원본과 출력물의 동일성이 인정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원본이 압수 시부터 출력 시까지 변경되지 않았다는 무결성과, 복제·분석에 사용된 도구·절차의 신뢰성까지 담보되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나아가 대법원 2021. 11. 18. 선고 2016도348 전원합의체 판결은, 휴대전화처럼 방대한 개인정보가 담긴 정보저장매체를 임의제출받아 압수하는 경우라도 혐의사실과 관련된 전자정보만을 선별해 압수해야 하고, 그 탐색·복제·출력 과정에서 피압수자의 참여권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디지털 증거는 그 내용이 진실인지를 따지기 전에, ‘원본 그대로’ 적법하게 확보되었음을 먼저 증명해야 비로소 법정에 설 자격을 얻는다.
이 원칙은 지금도 계속 정교해지고 있다. 대법원은 가장 최근인 2026. 2. 26. 선고 2025도4422 판결에서, 압수·수색영장에 적힌 ‘압수할 물건’에 포함되지 않은 물건을 압수하는 것은 위법하고, 사후에 영장을 발부받았다거나 피고인·변호인이 증거로 함에 동의하였다는 사정만으로는 그 위법이 치유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특히 피의자와 변호인 사이에 오간 전화통화 대화 녹음파일 자료에 대한 압수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곧 방어권의 핵심을 건드리는 것이어서 원칙적으로 위법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에 기초해 얻은 2차적 증거인 수사보고서 역시 원칙적으로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해당 부분을 무죄로 본 원심의 결론을 수긍했다. 결정적으로 보이던 자료들이 절차의 위법을 이유로 법정에서 통째로 배제된 것이다.
형사사건을 앞둔 의뢰인이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했는가”만이 아니라 “그 진실이 어떤 절차로 수집되어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가”이다. 진실은 사건 현장에 있지만, 유죄와 무죄는 그 진실이 법정에서 증거로 살아남는가에서 갈린다. 결정적 증거가 법정에서 사라지는 순간을 줄이는 일, 반대로 묻혀 있던 진실을 증거로 되살리는 일. 그 사이 어딘가에 형사변호사의 자리가 있다고 믿는다.
김민후 변호사(법무법인 선)
출처 : 법률신문(https://www.lawtimes.co.kr)